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콰메 은크루마 (문단 편집) === 독재와 실각 === 감옥을 반대 세력 콜렉션 전시장으로 만들었고 [[일당 독재]]를 추진했으며 그의 지지자들이 권력을 남용해 반대파 등의 사람들을 무단으로 잡아가도 눈을 감고 무시하였다. 또한 자신이 가용할 자금 동원을 위해 카카오 유통 공사를 악용했다. 본디 이 기구는 골드 코스트에서 생산된 [[카카오]]를 모두 매입 수출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구체적으로 카카오의 가격 변동을 억제해 안정된 수입을 카카오 농가에 가져오려 했지만, 은크루마는 자금 동원을 위해 카카오 매입 가격을 낮추고 그 차액을 착복했다. 이는 유통업자 및 농업인들의 반발을 초래하였고 이로 인해 대부분의 신생국이 겪는 무질서와 국가와 국민의 역량 부족으로 인한 혼란이 점점 가속화되었다. 거기에 말로는 좋은 것들을 갖다 붙이면서 실상은 아프리카의 각 지역/민족/부족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목놓아 비판하던 식민지 시절 국경선[* 다만 이건 어쩔 수 없다. 국제법적으로 비록 자결권과 충돌하는 감은 있지만 국제적 안정 차원에서 독립 이전의 행정적 경계를 그대로 독립 후 국경으로 인정하는 원칙이 널리 자리잡았기 때문이다.]과 지배 체계를 그대로 내지 약간 바꿔서 사용했으며 반대하는 사람들은 감옥에 처넣었다. 예를 들어 58년 금 광산 광부 파업 이후 만든 법을 이용해 61년 철도 노동자 파업당시 반대파들을 자신의 감옥 콜렉션에 수집한 일이 있다. 국내 경제에 대한 외국 자본의 개입을 방지하기 위래 만든 외국 기업의 국내 직접 투자를 불허하는 정책은, 국내 개발을 추진 민간 자본을 해외에서 도입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그가 야심차게 추진하던 카카오 집단농장도 실패로 끝났다. 카카오는 원래 소규모 농가에서도 충분히 채산성이 나오는 작물이며, 집단화시켜야 할 필연성이 부족해 정책 초기부터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기는 커녕 반대가 심했었지만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밀어붙인 정책이었다. 또한 집단농장 정책이 실패함에 따라 기계화에 필요한 비용도 경제적 부담이 되었다. 볼타 강에 거대한 인공 호수를 만들고 그 전력으로 [[알루미늄]] 정련 공장 등의 공업지대를 가동시키고 동시에 주변국에 잉여 전력을 판매하고 외화를 얻는다는 계획을 세우고 [[1962년]] 1월 착공해 1966년부터 가동을 시작했지만 예상을 밑도는 성과밖에 얻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시간이 지나면서 은크루마가 권력의 힘을 동원해 완전히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버린 경찰의 서슬에 눌렸긴 했지만 국민의 그에 대한 불만은 높아져갔으며 개인적으로는 경찰을 완전히 수중에 넣어 자신의 호위겸 수족으로 쓰면서도 암살 위협에 대해 상당히 두려움을 느꼈다 한다. 거기에 경제정책은 별 효과없이 망크리를 조금씩 타며 1957년 2억파운드의 외화와 2천만의 부채를 가지고 있던 건전한 재정을 몇 년 사이에 쫄딱 말아먹고 있었다.[* 64년 부채 4억 파운드, 외화보유고 0.] 은크루마 자신이 의욕적으로 주도한 외교전은 아프리카 통일기구[* [[아프리카 연합]]의 전신]로 그 결실을 맺긴 했지만, 정작 본부는 그에게 반대 파벌이었던 [[에티오피아]]의 [[아디스 아바바]]에 위치했으며 기구의 성격도 이쪽에 가까운 등 자신의 사상을 제대로 투영시키지도 못해 반쪽짜리 성과가 되어 어디가서 맘껏 자랑하기엔 힘든 상황이었다. 그 후 1964년에는 득표율 99.91%라는 기적의 수학을 발휘한 [[부정선거]]를 벌여 일당독재, 종신대통령 체제를 어거지로 만들었으나 그가 국가 및 국민의 역량도 생각하지 않고 무리하게 벌린 공업 정책이 대차게 실패하는 바람에 경제 혼란이 발생하여 국내의 지지를 잃었고, 그의 사상에 기반하여 사회주의 국가와 가깝게 지내고 그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더욱더 공산권 제2세계 국가들에게 다가서는 대외정책으로 인해 서방 국가들의 어그로를 모는 행동을 한 덕분에 그는 국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점점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되었다. 결국 1966년 2월 24일 베이징에 그가 갔을 때 경찰로 이루어진 친위대 설치 및 군 숙청을 한 덕분에 은크루마 반대 세력이 강한 상황이었던 군이 서방국가 첩보기관들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서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서아프리카로 돌아온 은크루마는 [[기니]]에 망명처를 마련했는데, 당시 기니 대통령 [[아메드 세쿠 투레]]는 그와의 유대를 표명하기 위하여 은크루마를 기니의 공동 대통령으로 선언했다. 그 후 그는 망명생활을 하며 저작활동을 하다가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1972년 4월 27일, 암으로 인해 63세를 일기로 사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